あらすじ
“스스로 가라앉은 힘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었음을” 꾸밈없는 생활과 성찰이 자아낸 맑은 서정의 세계 소란한 세상에 건네는 흙의 언어를 배우는 시간 노동자이자 농민으로 “따사롭고 환한 시”(정우영 시인)를 지어온 김용만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가 창비시선 529번으로 출간되었다.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등단 34년 만에 펴낸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 2021) 이후 4년 만의 신작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이모저모를 질박한 대지의 언어와 정겨운 토속어로 진솔하게 기록한 ‘산중 일기’를 들려준다. “읽을수록 마음이 맑아져오는”(김해자, 추천사) 순박하고 따뜻한 시집으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우는 단정한 문장의 울림과 단형 서정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91편의 시를 부 가름 없이 제목의 가나다순으로 실었다. 시집의 제목 역시 첫 시인 「가시」부터 마지막 시 「황토」까지 순순히 가닿는 시인의 담박한 언어를 담아냈다. 장식적인 삶 대신 생명을 기르는 노동을 택한 시인의 문장이 각박한 세상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깊은 평화와 위로를 선사한다. “고랑이 깊으면 밭두둑이 배부르지 자연은 꼬부장한 게지” 세상 만물과 터전을 공유하는 ‘평화로운 가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살피고 돌보는 “대지의 청지기”로서 “한 사람의 혁명”(고영직, 해설)을 추구한다. 그 ‘한 사람의 혁명’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세계를 새롭고, 낯설고, 다르게 보며 ‘세계의 복수성(複數性)’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시인은 “꽃밭을 텃밭으로” 바꾸며 자기 안의 “꽃들을 지우는 중이다”(「꽃밭을 텃밭으로」). 인위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꽃밭을 꾸미기보다는 산과 숲에 섞여 들어가 텃밭을 일구는 노동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가라앉은 힘”에서 “다시 일어서는 힘”(「뜬물개떡」)을 발견해내고, 자연의 섭리대로 따르면서 노동하는 삶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다”(「겨울, 산에 기대어」)고 말한다. “자연은 꼬부장한” 것이라며, 그 굽은 모양대로 살아가는 것이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묵정밭 3」)임을 담담하게 술회한다. “산중 적막한 고요와 가난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나무가 없으면 새도 안 온다」) 되새기며 새벽 마당을 잠시 서성이기도 한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자연 만물을 ‘소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시인의 생태학적 감각이다. 시인은 자신이 사는 집은 “무슨 특별한 집”이 아니라 “사시사철 찾아드는/벌 나비 집”이고 “바람과 햇살 오가는/두꺼비 집”이며 “집 찾아드는 오만 것들”(「밤마다 내려오는 별들은 어쩌고」)의 집이므로 ‘당호’를 붙인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말한다. 이는 대지는 뭇 존재의 공유지여야 한다는 시집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또한 자연이 인간보다 우선하고, 노동이야말로 삶을 지켜나가는 근본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시인은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흙 속에 돌을 묻는”(「겨울, 산에 기대어」) 산의 마음까지도 능히 헤아린다. 매일의 노동을 통과해 비로소 순리에 가닿는 정직한 시심 김용만의 시에는 몸으로 살아낸 노동의 시간과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시인은 ‘마찌꼬바’(작은 공장을 뜻하는 일본어) 용접사로 살았던 과거의 시간과 산중에서 땅을 일구고 시를 쓰는 현재의 시간을 겹쳐놓으며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되새긴다. “마찌꼬바 삼십년 세월”을 “쇠토막같이 언 손으로/종일 난간 움켜쥐고 매달”(「고드름」)려온 생애는 고되고 질긴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외롭게 살았”으나 “한세상 비겁하진 않았다”(「보리밥을 먹다가」)고 회고한다. 시인의 산중 생활 또한 단순한 귀촌살이가 아니다. 시인은 흙 한줌, 돌 하나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돌 고르고 나니 흙이 남”아 “그 흙을 옮겨 꽃밭을 만들”고, “흙 고르고 나니 돌이 남”아 “그 돌로 돌담을 쌓”(「겨울, 산에 기대어」)아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흙과 돌멩이 모으고 가려 쌓으며/몸 써” 묵정밭을 개간하고 “호미 끝을 세워/서늘히 땀에 젖고 싶다”(「딱새 놀다 가는」)는 소망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공생공락하는 삶(해설)을 꿈꾼다. “잘 짓든 못 짓든/나누는 것도 농사다”(「감자 캤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노동의 목적을 ‘나눔’에서 찾는다. 물론 이처럼 공유와 환대의 원리가 순환하는 삶은 요원하다. “한 노동자가 타 죽었다 한들/사람들 이제 왜냐고 묻질 않는” “반응 없는 시대”를 실감하며 시인은 “흐느끼며 돌아서 눈물 훔칠/시퍼런 시인 하나 그립다”(「대낮에」)고 말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혁명은 끌고 가는 게 아니라/밀고 가는 것”(「빠꾸 아재」)임을 역설한다. 앞장서서 이끄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뒤에서 서로 등을 받쳐주는 평범한 이들의 온기가 결국 세상을 움직인다는 믿음이다. “시는 단맛보다 쌉쏘롬한 쓴맛”(「시인」)이라는 깨달음을 체득한 시인은 삶의 전환 이후 오직 그 길을 향해 “직심 있게”(「직심」) 살아간다. 김용만의 시는 어렵지 않다. 흙냄새가 나고 밥 냄새가 난다. 현학적인 수사 대신 “똥이 힘이다”(「똥이 힘이다」)라고 외치는 직관적인 언어로 생의 비루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포착한다. 요양병원의 노모와 나누는 애틋한 대화, 아내를 향한 무심한 듯 깊은 사랑, 먼저 떠난 이웃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집 곳곳에 흩뿌려져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한순간 먹먹하게 한다. 특히 “가난은 어째서 평화로운지”(「꿈」)를 물으며 산중의 적막과 심심함을 즐기는 모습은 속도와 효율을 강요하는 요즘 시대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는 팍팍한 도시의 삶에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멈춰 서서 발밑의 흙을 바라보게 하는 다정하고도 단단한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차례 가시 가을 길 감자 캤다 같은 산에 살면서 겨울, 산에 기대어 고드름 고백 그래도 사람이 좋다 그러니까 하느님 소릴 듣지 그믐달 기분 좋은 밤 꽃 꽃밭을 텃밭으로 꿈 끝 나무가 없으면 새도 안 온다 날은 흐리고 싸락눈이 내렸다 노을 농부는 등이 역사다 눈 내리는 밤 달맞이꽃 대낮에 대설 딱새 놀다 가는 똥이 힘이다 뜬물개떡 만추 먹감나무 먼 젖은 산이 못난 시인 묵정밭 1 묵정밭 2 묵정밭 3 민들레 반성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어쩌고 배추 벌초 보리밥을 먹다가 봄날 빠꾸 아재 사람덜이 그러면 못쓴다 사람들은 왜 그럴까 사람 별것 아니네 사람의 일 사랑 산 산길 걸으며 산길에서 산의 언어는 침묵이다 산중에 오는 비는 발 디딜 곳이 많습니다 새 새를 기다리는 중이다 새벽길 서점에 갔다 선글라스 세상이 시끄럽다 소똥 시월 시인 시인네 배추밭 십일월의 비 안부 어머니 어머니 없는 첫봄이다 여름밤 예의 오늘의 일기 1 오늘의 일기 2 오월 우중 일기 월사금 위봉사 일기 작은 나비 전국적으로 전지 졸라 지지대 직심 차마 채송화 콩 타작 토끼풀꽃 풋감 핑 다녀오세요, 했다 한수 양반 햇살, 좀 놀면 어때 호미 황소 황토 해설|고영직 시인의 말 책 속으로 새해 작은 꿈 하나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서는 일이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별들은 언제 잠들고 언제 일어나는지 그 짙은 어둠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누가 훔쳐 갔는지 꽃씨들은 눈 속에 살아 있기나 한지 산그늘은 왜 마을을 들러 가는지 가난은 어째서 평화로운지 잠시 마당을 서성이는 일이다 오늘 밤은 별이 참 많네, 들어와 책상에 앉는 일이다 ―「꿈」 전문 한 노동자가 타 죽었다 한들 사람들 이제 왜냐고 묻질 않는다 반응 없는 시대 흐느끼며 돌아서 눈물 훔칠 시퍼런 시인 하나 그립다 ―「대낮에」 부분 가난도 고이면 힘이 되듯 네모반듯 김 나는 뜬물개떡 비 내리는 여름날 마루에 둘러앉아 입이 궁한 우리는 거침없는 어머니 손끝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지나는 이웃들 불러 한입씩 나눠 물고 뜬물개떡 하나에 행복했으니 스스로 가라앉은 힘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었음을 ―「뜬물개떡」 부분 오늘도 묵정밭에 나가 밭두둑을 만들었다 한삽 떠 우측으로 한삽 떠 좌측으로 (…) 칭찬에 인색한 마을 할머니 농사도 공단처럼 이쁘게 짓는다며 칭찬을 한바가지 놓고 가셨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왜 밭두둑이 휘었냐고? 그게 어머니 아버지 살았던 길이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다 자연은 꼬부장한 게지 ―「묵정밭 3」 부분 내 키가 작다고 그런 소리 마 나를 보려면 너도 작아져야 해 ―「민들레」 부분 시골집 하나 사 고쳤더니 집에 온 사람마다 당호를 지어 걸라 한다 그래도 저래도 좋지만 난 싫다 (…) 힘센 짐승이라고 지 맘대로 내걸면 폭력 아닌가 집 찾아드는 오만 것들 자기 집이라 하면 안 되는가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어쩌고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어쩌고」 부분 나무의 일은 하늘을 향해 바로 서는 것이고 땅의 일은 수평을 이루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수평과 수직을 지키는 삶이다 ―「사람의 일」 부분 이따만한 대보름달 앞산 위에 걸렸는데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마터면 쓸 뻔했다 ―「일기」 전문 바람 부는 솔숲 아래 붉은 황토 깊이깊이 아버지 유골 가지런히 묻어두고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서울역에 내려서니 구두 끝에 묻혀 온 붉은 살 한점 ―「황토」 전문 추천사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는 ‘뜬물개떡’ 같은 시집이다. “보리쌀 갈고 나면 뜬물 한방울도 아까워” “몇날 모인 뜬물”에 “강낭콩 돈부콩 뿌려 쟁반 가득 쪄내”어 “지나는 이웃들 불러 한입씩 나눠 물고” 행복해하며 “가난도 고이면 힘이 되”고 “스스로 가라앉은 힘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었음을” 맛보게 한다. 누가 “차마 놓을 수 없는/처마 밑 허공에서” 눈물 흘리고, “크레인 위 간판 전기선을 잇다” “쇠토막같이 언 손으로/종일 난간 움켜쥐고 매달”려온 노동자의 생애를 떠올렸나. 어느 시인이 “먼저 젖”고 “먼저 뜨겁고” “먼저 무겁고” “먼저 아”픈 농부의 등을, “흘러내린 땀 가슴으로 안”고 “흘린 땀 끌어안고 등이 굽는” 농부의 뒷모습을 주목했던가. 김용만은 “입 다물어야 속 차오르는//배추밭”처럼 말을 아끼는 시인이다. “목숨을 구차하게 끌지 않”고 “뚝,//서늘히 절명”하는, 노을 없는 산중에 살면서 시인은 역시나 묵정밭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괄시하지 않는구나. “돌 고르고 나니 흙이 남”아 “그 흙을 옮겨 꽃밭을 만들”고, “흙 고르고 나니 돌이 남”아 “그 돌로 돌담을 쌓”는 사람이구나. 산의 마음을 헤아리며, 흙 속에 돌이 있어 심심하지 않다니. 읽을수록 마음이 맑아져오는 이 시집을 넘기며 나도 시인처럼 “서투른 게 희망”이 아닐까 중얼거린다. 서툴고 굽고 삐딱한데 돌멩이까지 함께하는 시인의 배추밭과 감자고랑을 생각하며, 이리 ‘못난 시인’이 있어 즐겁고 행복하다. 김해자 시인 시인의 말 또랑 건너 박씨 아재 돌아오셨나보다 식은 굴뚝에 연기 난다 눈이 매웁다 연기보다 더 매운 게 사람 정이다 2025년 겨울 김용만






